고려 청자에는 모란, 국화, 갈대, 버드나무 등과 같은 화초 문양 장식이 많이 사용되었고, 도공들은 때때로 화초 사이에 나비와 새의 문양을 더하기도 했다. 춤추는 나비와 가지에 앉아 쉬고 있는 새의 모습을 통해 생기발랄한 자연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위의 완(碗)은 반듯하고 둥근 주둥이, 깊은 곡선의 몸통, 오목하게 들어간 완의 중심, 낮은 바닥, 둥근 테두리 받침의 모양을 하고 있다. 바닥 부분에는 균열이 있고, 세 개의 받침대 흔적이 남아있다. 유질(釉質)이 고르고 매끄러우며, 일부 유면에는 관입(貫入)과 철반(鐵斑)이 있다. 둥근 테두리 받침 부분에는 유약층이 비교적 얇아 군데군데 갈색의 태토(胎土)가 드러나있고, 전체적인 문양은 상감기법으로 장식되어 있다.
완의 바깥 벽에는 네 개의 원형 개광(開光)이 있는데, 절지모란(折枝牡丹)이 상감이 되어 있고, 개광 사이에는 당초(唐草) 문양이 새겨져있다. 하복부는 이중의 연판문(蓮瓣紋)으로 꾸며져있고, 현문(弦紋)이 각 문양 간의 경계 역할을 한다. 완의 중심 부분에는 국화문(菊花紋)이 새겨져 있고, 그 외의 부분은 연주문(連珠紋)이 포함된 이중의 연판문과 현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안쪽 벽에는 두 부분이 짝을 이루는 절지화훼(折枝花卉)가 있고, 이는 간격을 두고 배치되었으며, 꽃송이들은 여러 각도와 다양한 자태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절지화훼 위에서 쉬고 있는 백학(白鶴)한 쌍이 묘사되어 있는데, 다리와 부리가 모두 검은색을 하고 있다. 절지화훼 사이에는 정교하고 귀여운 네 마리의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다.
고려인들은 구름과 학이 함께 있는 모습을 좋아했기에 도자기 장식의 소재로 종종 사용되었다. 운학문(雲鶴紋)이 고려에서 사랑 받았던 주된 이유가 중국의 도교 영향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도교에 심취했던 북송 휘종(徽宗)과 고려 왕실 사이에는 밀접한 왕래가 있었고, 이러한 관계는 도교가 조선 반도로 전해지는데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천자(북송 휘종)께서 먼 변방에서 신묘한 도(道)에 대해 듣고 싶어함을 헤아리시어 사절(使節)을 보내셨다. 도사 두 명을 함께 보내셨고, 교법에 통달한 자를 고르셔서 훈도하게끔 하셨다. 고려의 예종은 신심이 깊으니……(天子眷彼遐,願聞妙道,因遣信使,以羽流二人從行. 遴擇通達敎法者,以訓導之. 王俁篤於信仰)」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당시 왕실 귀족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시문을 통해서도 도교 사상의 표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시문 작품 속에 나타난 나비에 대한 묘사가 도연명(陶淵明), 그리고 도교 사상과 관련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려 문인 이인로(1152-1220)의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 에는「구함은 구함 없음에 지나지 않는 것, 나비 날개가 되어도 오히려 기쁘거니와(求不過於無求,化蝶翅而猶悅)」라는 내용이 담겨있고, 《동문선 (東文選)》의 <도원도(桃源圖)> 라는 이름의 시문 중에는「이 몸이 나비가 된 줄 누가 알았으리, 이 곳이 선경이라고 서로 자랑들을 하니(誰料是身曾蝶化,相誇此處信仙寰)」라는 문장도 찾아볼 수 있다.
위 완의 외벽은「흑지상감(黑地象嵌)」의 방식을 통해 당초문(唐草紋)을 감식(嵌飾)하였고, 이는「역상감(逆象嵌)」기법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기법은 문양을 제외한 태토(胎土) 의 배경 부분을 파내어 백토나 적토 중 한 가지를 선택하여 바르고, 문양 위에 푸른색 유약을 바르면 흰색 배경 혹은 검은 색 배경 위로 장식한 문양이 드러나는 방법이다. 이를 백지상감 혹은 흑지상감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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