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를 주요 신앙으로 여기고 있는 지역은 상당히 광범위하다. 그러나 옥 생산지의 분포 및 동아시아 지역내 중화 문화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및 동유럽 등지에 강성했던 4대 제국 (혹은 왕조)도14세기 말 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각기 다른 수준의 옥 조각 공예가 생겨났다. 당대예술사에서는 보통 이를「이슬람 옥기」라고 통칭한다. 이 4개의 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까지 이르렀던 티무르 제국(1370-1506), 서아시아에서 동유럽까지 이르렀던 오스만 제국(1370-1506), 서아시아의 사파비 왕조(1501-1736), 그리고 남아시아의 무굴제국(1526-1857)이다.
15, 16세기에는 이슬람 옥기의 수량이 많지 않았고, 그 모습도 금속과 자기의 영향을 많이 받아 특색있는 모습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17세기 전반, 무굴 제국의 군주인 샤 자한(Shah Jahan, 1627-1658)은 유럽과 페르시아의 예술 장인들을 영입했고, 이로인해 유럽, 중국, 중앙아시아 및 인도 본토 예술의 정수와 융합될 수 있었다. 꽃과 과일, 혹은 말과 양의 머리가 주요 문양으로 쓰였고, 차갑고 딱딱한 옥이라는 재료를 활용하여 자연의 생기발랄함을 노래했다. 이 때가 되어서야 이슬람 옥기만의 독특한 풍격이 생겨났다.
전형적인 무굴 옥기의 영향 아래, 인도의 다른 토후국 역시 무굴 옥기와 비슷하면서도 본토의 스타일이 담겨 있는 옥기를 발전시켜갔다. 비록 무굴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았지만 교류가 매우 빈번했던 오스만 제국 역시 옥으로 꽃 문양의 부조를 제작했다. 위에서 언급한 세 지역의 옥기는 대부분 매우 정교하고 세밀한 방식으로 조각되었고, 심지어 금과 보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다.
18세기 후반, 건륭제는 전투 끝에 중앙아시아의 동쪽 지역을 청의 영토로 편입했고, 이 지역을 ‘신강’(新疆)이라 불렀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슬람 옥기는 끝 없이 이어지는 조공을 통해 자금성으로 유입됐고, 이를 본 건륭제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신선의 솜씨’,‘귀신의 솜씨’라는 단어를 사용한 글을 남기기까지 했다. 제왕의 탄복은 위구르족과 한족 옥기 기술자들이 큰 돈을 벌기 위해 이슬람 옥기를 경쟁적으로 모방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중국와 인도간의 밀접한 교류는 이 두 나라의 옥기 장인들이 서로의 정수를 흡수하며 더욱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게끔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