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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시아는 아시아 남부를 의미하며 현재의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부탄, 네팔, 스리랑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지리적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의 남쪽에 위치하고, 동쪽으로는 벵갈만, 서쪽으로는 아라비아해, 남쪽으로는 인도양과 맞닿아있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으며, 기후는 온난하고 습하다.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유역에서는 인도 고대 문명이 발생했고, 기원전 5세기에는 불교가 시작되며 급속히 퍼져나갔다. 불교의 전파로 인해 아시아 각지에서는 남아시아 복장을 한 불교 조형물이 등장했고, 이러한 조형은 대부분 상반신이 노출되어 있으며, 재단하지 않은 긴 천이 하반신에 둘러져있다. 이따금 어깨에 긴 천이 걸쳐져 있거나, 허리에 장식품이 묶여 있는 경우도 있다. 남아시아 민족의 의복 문화 중 위의 특징들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는데, 여성들은 ‘사리’, 남성들은 천을 허리에 둘러 묶는 ‘도티’ 를 입는다. 이는 현재 전 세계적인 의복상의 유행과 매우 상반되는 모습을 보인다.
인도 반도의 서북부 지역은 오래 전부터 중앙 아시아 민족의 유입으로 인한 영향을 받아왔다. 중앙 아시아에서 유행하던 재단된 상의와 바지 그리고 외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후에는 무굴제국의 황실 및 귀족들의 화려한 복식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반도 북부 지역에서 방목 생활을 하던 소수민족들은 자수 및 염색에 매우 능했고 재단된 의복을 입었다. 이는 기마와 유목 생활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남아시아 민족은 지금까지도 전통 복식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데, 사리를 입는 여성이든 재단된 옷을 입은 유목민족이든 모두 장신구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대부분 상당히 농염한 색채를 선호하며, 금속 혹은 반짝이는 재질의 장신구을 좋아한다.
이 전시는 본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남아시아 복식 가운데 선별된 대표적 소장품이며「사리의 멋」,「빼어난 민간 의상」,「화려한 궁중 의상」의 3개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채롭고 화려한 남아시아 민족의 옷과 장신구는 관람객들을 남아시아 복식 문화의 아름다움으로 안내할 것이다.
아시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광활한 육지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의 인구 수의 60%을 점하고 있다. 천 여개 이상의 민족이 각지에 분포되어 있고, 매우 다원화된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흥미롭다. 의.식.주.행의 각 분야도 지역적 이유로 인해 다양한 면모가 존재한다. 선사시대부터 역사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민족들은 빈번한 접촉과 교류를 나누었고, 점차 어울리고 융화되는 과정 속에서 제 민족만의 특색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서로의 것에 영향을 끼쳤다. 예술 문화 방면에서 그 모습은 특히 더 두드러지는데, 자신들만의 예술 문화를 발전시키는 부분에서 각 지역의 여러가지 문화적 요소들이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국립 고궁박물원 남원은 아시아 예술 문화에 대한 이해에 특별히 심혈을 기울이는 박물관이다. 본원의 소장품 및 여러 박물관으로부터 옮겨 온 풍부하고 빼어난 문물을 통해, 수 천년간 이어져 온 아시아 각 지역 문화 및 변천, 그리고 각 예술이 서로 어우러지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본 전시실은 ‘대만에 견고하게 서서 아시아를 바라본다’ 라는 개념을 전시의 주 목표로 설정하여 「아시아 이해하기」,「인도 문화권」,「중화 문화권」의 3가지 영상을 제작하였다. 혁신적이면서도 정교한 설명과 하이 테크닉의 촬영 기법이 조화를 이루며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예술 문화 작품이 더욱 돋보인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은 아시아 문명의 심오함과 웅대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발원지는 아시아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인도이다.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한 기원전 6세기부터 이슬람 세력이 인도를 침범한12세기말까지, 약 1700여년 간 불교는 계속 발전해왔다. 불교의 발전 과정 가운데 교리는 시대에 따라 다듬어졌고, 종교적 내용은 더욱 충실해졌으며, 사상체계 역시 더욱 완전해졌다. 또한 각 왕조 통치 계급들의 보호 및 보급, 승려들의 발양, 상인과 여행객들간의 왕래로 인해 인도 불교 신앙은 날로 그 세력을 넓혀갔다. 그 영향력은 중앙아시아, 중국, 티벳, 몽골, 스리랑카, 동남아시아까지 뻗어갔으며, 동북아시아의 조선 반도 및 일본 역시 중국과의 빈번한 왕래로 인해 자연스럽게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는 현재의 불교가 아시아 각지에서 다채롭고 다양한 문화의 꽃망울을 활짝 피울 수 있게 하였다.
아시아 각지의 불교 조형물 및 경전은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불과와 같은 수행의 경지에 이르게끔 하는 공통적인 종교적 메시지를 띠고 있다. 그러나 매 지역의 문화적 토양과 양분이 다르기에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었음에도 각기 다른 지역적 특색을 띠며 발전해나갔다. 이로서 수 없이 다양한 형상의 부처, 보살, 천왕, 호법 등이 생겨났다. 각기 다른 사경 방식과 예술적 표현 방법은 아시아 불교 예술을 더욱 이채롭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끌어냈다.
본 전시는 「탄생의 기쁨」,「붓다의 지혜」,「보살의 자비」,「경장의 변천」,「밀교의 신비」의 5개 섹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대 순으로 전시된 각지의 불교 조형물과 경전 등을 통해 불교 예술의「불변」과「변화」를 표현했고, 관람객들은 같은 시대의 다른 지역 불교 예술의 아름다움을 관람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종교 철학의 심오함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탄생한 청화자기는 매우 널리 전해졌고, 세상 많은 이들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맑고 밝게 빛나는 질감의 자기 위에 푸른색 염료를 이용해 그린 섬세하고 정교한 무늬와 청백의 빛깔이 밝게 비추며 이루는 조화와 대비로 인해 청화자기는 화려한 자기의 대명사가 되었고, 생활의 미학을 표현해내는 최고의 표현 방법이었다.
지금으로부터 700여년 전의 원나라 때, 강서(江西)에 위치한 경덕전(景德鎮) 에서는 처음으로 고온에서 청화자기를 구워냈고, 곧바로 국내.외 판매를 시작하며 당시 자기 산업의 새로운 인기상품으로 자리잡았다. 명대에 이르자 청화자기의 제조 기술은 더욱 성숙되어 형태와 장식이 더욱 훌륭해졌고, 명대에는 아시아 이웃 국가들간의 교류가 밀접했기에 청화자기에 신비로우면서도 흥미로운 이국적인 풍취가 더해지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단아하고 정교했던 관요(官窯)와 비교했을 때, 자유분방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민요(民窯)의 문양과 형태 역시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대항해시대 및 무역의 발달로 인해, 이 청백의 회오리바람은 유럽과 아시아 각국을 강타하며 전 세계의 상품이 되었다.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14세기 후반부터는 아시아의 베트남, 한국, 일본 및 이란 등도 청화자기의 제작 행렬에 가담했다. 그들은 중국과 경쟁을 하기도 하고, 자급자족을 하기도 했지만 청화자기 교류면에서 살펴볼 때 중간 다리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국립 고궁박물원은 청 황궁에 보관되어 있던 청화자기를 포함한 수 많은 명대 관요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통로를 통해 상당수의 민요 청화자기를 수집함으로 명대 청화자기의 발전 맥락을 더욱 잘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본 전시는 총 4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삼 백여 년의 명대를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태조부터 선종까지」,「영종부터 무종까지」, 「세종부터 명대 말기까지」의 관요 최상급 작품 및 동시대 아시아 기타 지역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여 관람객들이 작품을 비교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4번째 섹션은 아시아 각지에서 생산된 청화자기이다. 청화자기가 각지에서 어떤 다른 면모를 품은 채 발전했는지, 그리고 명 나라와 아시아 각 국간 문화 교류에 담당했던 그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아시아는 광활한 땅과 다양한 자연환경, 많은 인구와 수 많은 민족이 어우러져 다채로운 직물 문화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동아시아 대륙의 황하와 양쯔강 지역에서 오랫동안 발전해 온 뽕나무심기와 양잠업은 실크로드 문명을 일궈냈고, 열대기후의 동남아 민족들은 남녀가 모두 원통형 치마인 사롱을 입으며 각 지역의 서로 다른 사롱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남아시아의 인도 반도에서는 부녀자들이 긴 천을 몸에 두르는 사리를 입는데, 그 색상이 매우 화려하며 장식 공예 역시 매우 뛰어나다. 대초원에서 생활하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은 거친 문양과 대담한 색상을 사용한 옷을 입는데, 이러한 스타일은 선명함을 드러내는 오아시스 색채가 되었다. 이는 유라시아의 중간 지대에 위치한 터키와 시리아 지역의 비잔티움과 이슬람 스타일의 직물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본원은 역사적 의미가 매우 깊은 직물과 자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지난 몇 년 간 더욱 적극적으로 아시아 직물을 수집하여, 아시아 문물 소장의 규모를 늘려가고 있다. 본 전시는 다양하고 찬란한 아시아 직물 예술 문화를 표현하기 위해, 기존의 직물 소장품 중 엄선한 전시품과 함께, 심양 고궁박물관으로부터 대여한 청대 황실의 비단 의복을 더하여 전시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꾸몄다.
전시는「실크의 고향」,「사롱의 기품」, 「색의 향연」,「초원의 색채」, 「동.서의 만남」의 5개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역별로는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로 구별하여 전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짜기. 염색. 그림. 자수」섹션에서는 관람객들이 아시아 각지의 전통 직물 공예를 좀 더 이해하고, 더 나아가 아시아의 인문 예술이 이루어낸 놀라운 성과를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아주 오래 전, 한자는 조선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고, 17세기 초에는 중국의 도자기 기술이 역시 조선의 도공들을 통해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1610년 일본에서 첫번째로 자기를 제작한 곳은 사가현(佐賀縣) 아리타(有田町) 지역이었는데, 아리타의 자기는 이마리(伊萬里) 항구를 통해 출하하여 판매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 곳의 자기를 이마리 도기(伊萬里燒) 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마리 도기는 다채로운 색을 사용하여 중국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있어보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원류는 바로 중국 경덕전의 채색 자기이다.
17, 18세기에 이르자 이마리 도기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통한 국제 무역으로 그 세력을 널리 뽐내게 되었고, 중국 경덕전 자기의 위치를 차지하며 유럽에서 매우 인기 좋은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저 멀리 동방에서 온 이마리 도기가 유럽 왕족들과 귀족들 사이에서 서로 다투어 구매를 해야 할 정도로 진귀한 물건으로 여겨졌고, 궁전의 장식 및 연회 때의 중요한 식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이마리 도기는 외교 사절들의 방문시 빠질 수 없는 선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국이 그 원류이며, 경덕전의 자기를 배움으로 태어난 이마리 도기, 귀중한 물건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대항해 시대에 올린 화려한 닻은 지금도 변함없이 이마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차를 즐긴다는 것은 생활, 패션, 예술이자 문화이며, 차를 마시는 이들의 공통 언어이다.
차의 고향은 중국이며, 고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발전되어왔다. 해갈 및 약용으로 쓰이기 시작하던 차는 당.송대의 자다법과 점다법의 다도법을 거쳐 명.청대의 포다법으로 그 모습을 달리했고, 차잎의 제조방법의 변화로 인해 다기의 사용법과 차를 마시는 방법도 변해왔다. 중국의 차 문화는 사신과 무역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고, 이는 몽골과 티벳인들의 생활 속으로 자리잡아갔다. 차잎의 수요는 날로 증가했고, 이에 차마고도가 생겨나며 유목민족이 차를 마시는 방식과 도구도 함께 발전해갔다.
당.송대에는 일본에서 파견한 사신과 유학 온 승려, 상인들의 왕래로 인해 중국의 차 문화가 일본으로 전해졌으나, 일본 현지의 정신적 문화와 행차(行茶) 예절이 융합된 그들만의 엄격한 일식 다도로 발전했다. 명대 말기에는 복건(福建) 지역의 승려들이 소개한 민(閩)의 끽다법과 이싱(宜興)의 다기가 일본 문인들이 즐기던 담백한 끽다법과 어우러져 전다도(煎茶道)가 탄생했다.
명대 말, 청대 초에는 중국 동남부 해안에 거주하던 많은 이들이 이민을 떠나며 차를 마시는 문화 역시 동남아와 대만으로 퍼져나갔다. 대만은 복건과 광동 지역의 공부차(工夫茶)의 다도법을 이어왔을 뿐 아니라, 차를 즐기는 분위기 역시 예술적인 영역으로 발전시켜왔다. 《제라현지(諸羅縣志)》에는 대만 중남부에 야생 차나무가 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대만이 차 나무 재배에 적절함을 의미한다. 차 상인들이 민남 지역에서 들여온 차와 제조법을 지속적으로 개량해온 결과, 1980년대에는 고산차(高山茶)의 발전까지 일궈냈다. 고산차는 주로 대만 중.남부에서 재배된다.
전시는 위에서 서술한 내용의 맥락 순으로 이어진다. 「차의 고향—중화 차 문화」,「다도—일본 차 문화」,「차의 멋—대만 공부차(工夫茶)」의 3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고, 본 박물원의 차 문화 관련 소장 문물을 통해, 각 지역만의 독특한 끽다법과 차 문화를 담아냈다. 명대 다실과 일본 다실 및 현대 다석(茶席)등의 공간 전시를 통해 각 시대와 공간만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차 마시는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관람객들은 아시아에서의 차의 전파와 교류, 그리고 각 지역의 독특함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차문화에 대해서 심도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교를 주요 신앙으로 여기고 있는 지역은 상당히 광범위하다. 그러나 옥 생산지의 분포 및 동아시아 지역내 중화 문화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및 동유럽 등지에 강성했던 4대 제국 (혹은 왕조)도14세기 말 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각기 다른 수준의 옥 조각 공예가 생겨났다. 당대예술사에서는 보통 이를「이슬람 옥기」라고 통칭한다. 이 4개의 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까지 이르렀던 티무르 제국(1370-1506), 서아시아에서 동유럽까지 이르렀던 오스만 제국(1370-1506), 서아시아의 사파비 왕조(1501-1736), 그리고 남아시아의 무굴제국(1526-1857)이다.
15, 16세기에는 이슬람 옥기의 수량이 많지 않았고, 그 모습도 금속과 자기의 영향을 많이 받아 특색있는 모습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17세기 전반, 무굴 제국의 군주인 샤 자한(Shah Jahan, 1627-1658)은 유럽과 페르시아의 예술 장인들을 영입했고, 이로인해 유럽, 중국, 중앙아시아 및 인도 본토 예술의 정수와 융합될 수 있었다. 꽃과 과일, 혹은 말과 양의 머리가 주요 문양으로 쓰였고, 차갑고 딱딱한 옥이라는 재료를 활용하여 자연의 생기발랄함을 노래했다. 이 때가 되어서야 이슬람 옥기만의 독특한 풍격이 생겨났다.
전형적인 무굴 옥기의 영향 아래, 인도의 다른 토후국 역시 무굴 옥기와 비슷하면서도 본토의 스타일이 담겨 있는 옥기를 발전시켜갔다. 비록 무굴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았지만 교류가 매우 빈번했던 오스만 제국 역시 옥으로 꽃 문양의 부조를 제작했다. 위에서 언급한 세 지역의 옥기는 대부분 매우 정교하고 세밀한 방식으로 조각되었고, 심지어 금과 보물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다.
18세기 후반, 건륭제는 전투 끝에 중앙아시아의 동쪽 지역을 청의 영토로 편입했고, 이 지역을 ‘신강’(新疆)이라 불렀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슬람 옥기는 끝 없이 이어지는 조공을 통해 자금성으로 유입됐고, 이를 본 건륭제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신선의 솜씨’,‘귀신의 솜씨’라는 단어를 사용한 글을 남기기까지 했다. 제왕의 탄복은 위구르족과 한족 옥기 기술자들이 큰 돈을 벌기 위해 이슬람 옥기를 경쟁적으로 모방하는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중국와 인도간의 밀접한 교류는 이 두 나라의 옥기 장인들이 서로의 정수를 흡수하며 더욱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게끔 하기도 했다.
고려청자는 조선반도 고려 왕조(918-1392)의 가장 대표적인 자기로서, 주요 생산지는 전라남도 강진군 및 전라북도 부안군 근처이다. 이 곳에는 가마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생산량이 매우 풍부했다.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청색의 단색 자기가 주를 이루었고, 요 성종(1021-1031재위) 의 왕릉에서도 이러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북송 휘종(1100-1125재위) 시기, 고려에 사신으로 온 중국 관원 서긍(徐兢)은 고려청자의 유약 색채 및 형태에 대해 크게 감탄하였다. 고려와 남송간의 왕래 단절 후, 중국으로부터의 문화적 영향이 줄어들자 독창적인 모습을 갖춘 상감청자가 발전해갔고, 13세기, 14세기에는 고려청자가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며 세계 여러 곳으로 널리 전해졌다. 중국의 태평노인(太平老人)이 집필한 수중금(袖中錦)에서는 고려청자가 천하제일이라 평하였다.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솜씨가 매우 정교하고, 빛깔이 훌륭하다.」, 「산예출향(狻猊出香 사자모양을 한 향로) 역시 비색인데, …… 이 물건이 가장 빼어나다.」라는 내용을 기술하며, 고려청자는 맑고 투명하며, 비취와도 같은 유약색으로 시선을 잡아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치 여요(汝窯:송(宋)나라 때 엷은 청색의 자기를 구웠던 가마) 의「우과천청(雨過天青)」을 방불케하며, 자연을 본 받는 미학의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고려청자는 유약의 색상 뿐만 아니라, 음각, 양각, 조각, 투조, 상감, 진사채 등의 기술을 통해 자연만물의 생기를 묘사해냈다. 이는 고려인들이 자연에서 얻은 영감으로 예술 작품을 즐겨 만들었던 점이 반영되어 있다.
고려청자의 소장으로 이름 높은 일본 오사카 시립 동양자기 미술관은 특별히 엄선한 이백여 점의 작품을 통해 본 박물원의 아시아 예술 문화 박물관 개막을 축하했다. 전시의 기획자가 특별히 본원이 소장하고 있는 여와 청자와 대비되는 진열을 준비했는데, 이는 북송과 고려의 청자에 대한 취향 및 기호를 더 두드러지게 할 뿐 아니라, 여와와 고려청자가 갖고 있는 각 부분의 아름다움을 더욱 섬세하게 드러낸다. 본 전시는「푸른빛을 아끼다」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의 푸른빛이란 유약의 색상 뿐만 아니라, 새로움, 참신함의 의미를 띠고 있다. 이는 관람객들의 눈과 귀가 번쩍 뜨이는 새로운 경험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자이(嘉義)의 옛 명칭은 주뤄(諸羅)이며, 자난(嘉南) 평원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북회귀선은 현의 좌우를 가로지르고, 이로 인한 다채로운 자연경관과 깊은 역사 문화는 다양하고 근사한 멋을 뽐낸다. 경내를 흐르는 강물은 굽이굽이 흐르고, 바다로 이어지는 하구에는 퇴적층인 해안 평원이 펼쳐져 있다. 낮은 구릉, 골짜기 및 산맥 등 다양한 지형과 각기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이 어우러져 풍부하고 찬란한 문화를 일궈냈다.
선사시대 때부터, 자이 지역은 계속되는 해안선의 변동과 대풍(倒風)지역의 석호 연해 지형으로 인해 거주민들이 늘어났고, 점차 하구와 항구의 기능을 갖추기 시작하며 새로운 문명의 형태가 생겨나게 되었다. 대항시대가 시작되자 바다 건너의 유럽 문화와 중국 대륙의 동남부 지역의 인구가 유입되며 신.구 주민들은 산과 바다, 평원 지역에서 교류하고 융화되며 매우 다양하고 활발한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20세기 이후, 자이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신앙, 인문, 공예, 예술, 산업, 교육 등의 다양한 분야를 변모시키며 자이의 충만한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표현해냈다. 국립 고궁박물원은 역사적 기록과 진귀한 문물, 그리고 디지털 영상 등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풍부하고 다채로운 멋을 지닌 자이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뉴 미디어 기술로 제작된 영상은 시대별로 구성되어 있다. 「떠오르는 아침 해—지리」,「가읍(嘉邑)의 발흥—개발」,「인문의 집결지—예술과 문물」의 3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 사전 문명 시기부터 현대 자이의 역사 문화 및 지리 인문 경관을 담아내고 있다. 아울러 미디어를 통한 연표를 통해 자이의 풍부한 문화적 저력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